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샤를 드골 (문단 편집) ==== 집권 2기와 위기, 그리고 사임 ==== [[1967년]]에는 당시 분리독립 문제로 내부 갈등이 심각하던 [[캐나다]] [[퀘벡]]을 방문하여 공식 연설 중에 외교적 관례를 무시하고 "자유 퀘백 만세"를 외치면서 분리독립에 반대하는 캐나다인들을 격분시키기도 했다. 덕분에 [[영국]] 및 캐나다 정부는 스팀을 좀 받았다.[* 2차대전의 동지였던 [[윈스턴 처칠]]이 죽은 직후인 [[1965년]]부터 드골의 [[영국]] 견제는 싹수가 보였다. 처칠 생전엔 당연히 눈치가 보였고...] 아이러니한 건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대다수의 퀘벡인은 드골이 아니라 [[비시 정부]]를 지원했다는 것이다. [Youtube(amApwFT49JQ)] [[1967년]] [[몬트리올]] 국제박람회. 시청 광장 앞에 모인 군중에게 당시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은 발코니에 나서서 연설을 시작한다. 그리고 [[세인트로렌스 강]]을 내려오면서 맞이한 수많은 환호 군중을 보면서 그는 [[독일]]에게서 해방된 [[파리(프랑스)|파리]]에 당당히 재입성했을 때를 상기했다며 짧은 연설을 이런 말로 마무리했다. 위의 영상 7분 35초부터 보면 된다. >'''Vive Montréal ! Vive le Québec !''' >'''[[몬트리올]] 만세! 퀘벡 만세! (환호)''' > >'''Vive le Québec... libre !''' >'''자유... [[퀘벡]] 만세! (길고 열광적인 환호)''' > >'''Vive le Canada français ! Et vive la France !''' >'''프랑스계 [[캐나다]] 만세! 그리고 [[프랑스]] 만세! (환호)''' 드골의 통치는 상당히 [[권위주의]]적이었으나, 유럽 국가답게 [[신대통령제]]가 행해진 다른 국가들보다는 유연한 면도 많았다. 이는 언론 통제 정책만 봐도 알 수 있다. 신문, 잡지 등 활자 언론에 꽤 관대했으나[* 드골 본인이 [[르몽드]] 설립에 관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뤼마니테]](L'Humanité)같은 기존의 좌파 성향 신문 역시 존속을 허락받았다.] 방송은 친정부 논조로 철저하게 통제했다. 그래서 [[68운동]] 와중에는 공영방송국(당시 명칭은 ORTF)[* 드골 시절에는 방송국이 하나 뿐이었고, RdF→RTF→ORTF로 국명이 3번 바뀌었다. 나중에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지스카르데스탱]]이 방송법을 대대적으로 개정하면서 독점체제가 붕괴됐다.] 직원들이 편집의 독립성을 요구하며 대대적으로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신문과 다르게 방송은 당연히 정부의 목소리를 전달해야 한다는 당시 정부 관리들의 구태의연한 인식[* 그래서 [[알제리 전쟁]] 때 TV방송에선 현장상황을 제때 볼 수 없었다고 한다.]과 함께 신문에 불신감을 가진 샤를 드골이 방송에 적극적으로 통제를 가했기 때문이다. 드골 시절에도 제5공화정의 대통령 권력집중은 유럽 현대 정치사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었고 후일 한국의 [[10월 유신]]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7년이라는 대통령 임기는 [[대한민국 제5공화국]]의 임기 기준이 되었다. 원래는 [[대한민국 제4공화국]]처럼 6년을 하려고 했다고.] 뢰벤슈타인은 이러한 드골의 통치를 38년간 계엄령을 유지한 [[장제스]] 치하의 대만, 한국의 [[이승만]] 정부, [[박정희]] 정부처럼 대통령이 의회와 법원을 압도하는 '''[[신대통령제]]'''로 분류하였다. 드골은 현재의 프랑스 대통령의 권한과 달리 지자체의 권한을 제한하는 여러차례의 [[국민투표]]를 통해서 사실상 독재적 권한을 행사했다. 드골의 정치방식은 한국의 이승만 정부, 박정희 정부, 전두환 정부와 같이 강력한 경찰력과 정보기관에 의존하는 비민주적 독재는 아니지만, 개인적인 인기에 의존하여 정국이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국민투표를 통해 강력한 권력을 확인받는다는 점에서 [[정치학]]적으로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에 해당한다. 당시 [[브레튼우즈 체제]]의 해체를 시도하던 [[미국]]에 반대하면서 [[금본위제]]의 강화를 주장한 드골의 대외 금융정책은 미국과 주변국의 강력한 견제를 받았다. 결국 1971년 당시 미국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이 달러의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면서 1944년 이후 지속된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되었다. 이것은 전후 케인스주의의 종말과 통화주의 체제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결국 [[1967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1967년 총선]]에서 드골계 우파는 부진을 거두며 겨우 과반수를 확보하면서 싸늘해진 민심을 확인하였고 이어 [[1968년]] 프랑스의 경제성장률이 집권 이후 최저인 4.4%로 하락하면서 경기가 악화되었으며, 드골 체제의 경직된 권위주의에 반발하는 전후세대와 이에 합세한 노동자들이 주도한 [[68운동]](이른바 '5월 위기')이 발생한다. 이 당시 드골 정권이 직면했던 위기 자체는 '정권이 붕괴 직전이었다'라는 평가까지 받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전후세대 학생과 이에 합세한 노동자들의 시위는 대략 5월 초부터 시작되어 점차 격화되면서 5월 22일 무렵부터는 전국 각지에서 경찰과 전투라고 불릴 정도의 대규모 충돌이 산발적으로 일어났고, 그 결과 25일 무렵에 이르면 (영국의 언론인이자 역사가인 로널드 프레이저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부는 몇몇 주요 도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프랑스 제 2의 도시인 [[리옹]]의 경우, 22일~25일 사이 격화된 시위대가 사실상 도시 전체를 장악한 상태에서 지방 경찰 병력 전부가 정부의 마지막 거점인 도청을 방어하기 위해 집결했으며, 수도 파리에서도 시위대가 프랑스 경찰의 시위 진압 전문 기동대인 CRS와 충돌하면서 도시 곳곳을 점거했다. 결국 25일~27일 사이, 정부는 당시 총리였던 [[조르주 퐁피두]]를 내세워 시위대와의 협상을 시도하지만 이 역시 결렬되었고, 시위는 더욱 격화되면서 당시 내각회의에서는 시위대가 대통령궁이나 의회를 점거하는 상황까지 우려하게 되었을 정도.[* 당시 내각회의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안건 중에는 "만약 시위대가 '''핵무기 발사 통제 설비'''가 있는 엘리제궁(대통령궁)을 점거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시위대가 대통령궁을 점거한다는 것은 단순히 건물 하나가 점거당한다는 의미나, 심지어 '국가 권력의 상징인 대통령 관저'가 점거당한다는 의미를 넘어 정부가 핵무기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고, 시위대가 핵무장(...)할 가능성이 열린다는 의미였던 것. 물론 정말 가능성을 따진다면야 시위대가 핵버튼을 누르지 않을테고 만에 하나 진짜로 작동시킬려 해도 여러 안전장치들 때문에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관저가 점거당한다는 것이 가지는 엄청난 정치적 의미가 바로 "핵 발사 통제실을 빼앗길 수도 있다"라는 한마디로 설명되었고, 이런 위기 상황에서 <정치적 후폭풍을 감수하고라도 군대등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강제로 진압할 것인가>, 아니면 <시위대의 요구를 들어주고 해산을 유도할 것인가>, 하다못해 <주요 설비와 문건 등을 당장 파기할 것인가>까지 뭔가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큰일난다는 인식이 형성된 것.] 그리고 29일, 드골 비판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가 대통령궁 앞을 행진했을 때 드골은 대통령궁을 비운 상태였다. 드골은 당시 서독에 주둔해 있던 프랑스 육군 정예부대의 지지를 확인하기 위해 독일에 간 것이었다. 시위대는 이 상황을 '드골이 도망쳤다!' 고 받아들여 커다란 승리감에 젖었다고 하고, 반대로 드골의 부재에 큰 충격을 받은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서는 이후 '드골이 국민들에게 자신의 중요성을 깨우쳐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몸을 숨겼다'라는 도시전설이 생겨났다고 하지만 결국 밝혀진 바에 따르면 급박한 상황에서 내각에게도 알리지 않고 외국에 나간 것이었다. [[전시체제]]의 [[최고지도자]]로서 군대의 위력과 위험성을 잘 알고 있는, 드골을 포함한 [[장성급 장교]] 출신 공직자들이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군대에 대한 통제력 확보를 우선시해야 한다고 판단할 만큼 매우 심각한 위기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군#s-5.1|프랑스 육군]]의 [[기갑부대]]들은 '''국방부의 명령에 따라''' [[대도시]]들을 포위하면서 [[계엄령]]의 선포를 기다리고 있었고, [[프랑스 헌병군|헌병군]]도 대부분의 인원들이 폭동진압에 투입되었다. 이렇게 정치적 위기를 맞고 총리직을 야당에게 내줄 위기에 처하지만 이 직후(6월 셋째주) [[의회 해산]]권을 발동하여 치러진 [[1968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총선]]에서는 예상과는 전혀 달리 드골파가 압승, 그것도 '''개헌선'''(394/485)을 넘어가는 초압승을 거두면서(득표율은 58.1%) 국면이 전환되었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를 따져보면, 당시 드골 정권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68운동 세력의 주축은 학생들이었고, 당연히 이들은 '''투표권이 없었다.''' 그리고 운동의 격화로 정권 붕괴는 둘째치더라도 정부의 국가 장악력 자체가 위험한 상황이 되자(즉, 프랑스 대혁명 이후 계속 일어났던 몇번의 혁명 혹은 [[파리 코뮌]]에 근접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보수파가 결집하였다. 즉, 기존의 드골 지지자뿐 아니라 운동의 급진성과 과격성에 위협을 느낀 보수파 및 중도파 전반, 그리고 일부 온건 진보세력까지 (68운동의 반대항인) 드골 지지로 집결한 것. 반면, 반 드골 노선의 운동세력에게는 선거에서 승리할만한 정치적 조직과 구심력이 없었다. 즉, 운동세력 자체는 거대했지만 이들을 대변할 정치조직이 없고, 이들을 대표할 후보자도 없었다. 이건 어떻게 해결할 방법도 없는 문제인 것이, '대의제 민주주의적 제도 자체가 일부 정치 기득권층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형태로 변질되었다고 여기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써 대중의 직접적 정치 참여를 요구하는 목소리'와 '기존의 경직된 정치 조직에 대한 반감으로 조직화되지 않은 대중의 정치적 참여를 요구하는 목소리' 자체가 운동의 중요한 원동력이었던 것. 즉, 선거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여긴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것이니 당연히 선거를 위한 정치적 조직이 갖춰질 리 없고, 어디에 속한 사람이라도 좋고, 아무데도 속하지 않은 사람도 좋으니 누구든지 다 오라고 사람을 모았으니 모인 사람들 전체를 아우를 조직이 없는 것 역시 당연하다는 것. 결국, 이러한 정치적 상황 덕분에 드골 정권은 총선에서 압승,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드골을 반대하는 대중운동이 정권 전복 위협 직전까지 격화되었을 정도로 드골의 통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 자체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고, 그에 더해 5월 위기 자체가 (일단 극복에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드골의 리더십에 입힌 타격 역시 상당했다. 결국 드골은 1969년 4월 '[[1969년 프랑스 국민투표|지방행정과 상원의회 개편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개헌안이 47%대 53%로 부결되자 4월 28일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드골은 임기 내내 수세에 몰릴 때마다 자신이 제안한 정책에 대한 국민투표와 자신의 재신임을 결부하는 방식으로 돌파하는 방법을 즐겨 사용했다. 즉, "제가 제안한 이 정책에 국민 여러분께서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국민 여러분께서 저를 신임하지 않으시는 줄 알고 사임하겠습니다" 라고 승부수를 여러 번 던진 것. 이 경우 대통령을 사임까지 하도록 만드는 것은 지나치다거나, 대통령이 사임할 경우 발생할 혼란등에 대한 우려로 그 정책 자체에는 그리 동의하지 않더라도 할 수 없이 찬성표를 던지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드골은 임기 내내 이 방법을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정책을 추진할 동력을 얻고,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릴때마다 분위기를 일신해왔으며 이 때문에 "독재자라고 할 수는 없으나 권위주의적 포퓰리스트였다" 는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통령 신임과 결부된 국민투표>에 익숙한 상태였던 프랑스인들이 드골의 제안을 부결시켰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명백하다. 68운동이 정부를 붕괴시키기 직전까지 몰아간 상황에서 일단 정부가 붕괴되기를 원치 않기에 68운동의 반대항인 드골파에게 투표했지만, 드골 자신을 신임한 것은 아니라는 것. 말하자면 68년 5월 위기의 결과로써 '''드골 반대파는 패배했지만, 드골도 같이 패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